고흐, <의사 가셰의 초상> 1890 (오르세 미술관)
“나란 인간이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1890년 6월 빈센트 반 고흐가 평생의 후원자이며 유일한 벗이었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편지를 쓴 지 한 달 후인 7월27일 고흐는 오베르의 여인숙에서 피스톨로 가슴을 쏘아 자살했다. 나이 서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7년간 불같은 정열로 879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중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던 불행한 삶의 종말이었다. 그는 동료 화가인 고갱의 말대로 죽어서야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무시무시한 광기, 자신의 손으로 귀를 자르게 만든 끔찍한 예술가의 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생전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이 화가는 죽은 뒤에야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했다. 닭장의 문으로 사용되는 등, 동시대인들의 몰이해와 천대 속에 굴러다녔던 고흐의 그림들은 어느새 몇 천만 달러를 호가하는 명품들로 변했다.
화가 자신의 예언처럼 죽은 지 꼭 백 년 후인 1990년에 고흐는 영광의 절정에 올라섰다. 그가 죽기 직전에 그린 ‘의사 가셰의 초상’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무려 7500만 달러(837억 원)라는 경이적인 가격에 팔린 것이다. 미술품의 경매로는 최고가였던 고흐의 또 다른 그림 ‘붓꽃’(1889년 작)의 기록 3000만 달러를 두 배 이상 경신한 가격이었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기사에 의하면 ‘2000만 달러에서 시작된 경매가격이 4800만, 4900만, 5000만으로 올라가면서 경매장 안은 고함과 박수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한다. 7500만 달러, 크리스티측이 챙긴 커미션까지 합하면 825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의사 가셰의 초상’을 매입한 사람은 사이토 료헤이라는 일본인 사업가였다.
그림은 겹겹이 포장되어서 비밀리에 토쿄로 옮겨졌다. 사이토는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은 채 기온과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되는 특수 전시실에 보관해두었다. 일본으로 팔려가기는 했지만 정작 이 비싼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이토는 ‘의사 가셰의 초상’을 산 후 사업가로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3년 그는 골프 코스의 개발과 관련된 거액의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사이토를 몰락시킨 이 골프장의 이름은 반 고흐의 이름에서 따온 ‘빈센트’였다.
1996년 사이토는 ‘의사 가셰의 초상’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고 사망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금 고흐의 명화에 쏠렸다. 그러나 유족과 사업체, 채무자들 모두가 이 그림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이토의 생전에도 오리무중이었던 그림의 행방은 그가 사망한 이후 더더욱 미궁 속에 빠져들었다. 심지어는 사이토가 자신의 관 속에 그림을 넣어달라고 유언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실제로 사이토는 농담처럼 “‘의사 가셰의 초상’은 죽어서도 가지고 갈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자살 직전 그린 불후의 명작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었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인 '의사 가셰의 초상’이 중요한 이유는 경이적인 경매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의사 가셰의 초상’은 반 고흐 만년의 예술혼이 절정을 이룬 시기에 탄생한 명작이다. 1890년에 고흐는 귀를 자른 뒤 입원했던 생 레미의 요양원에서 나와 파리 근교의 시골 오베르에 머물렀다. 그해 5월부터 자살한 7월까지 불과 두 달의 기간에 고흐는 ‘오베르의 교회’ ‘오베르의 들판’ ‘푸른 하늘과 흰구름’ ‘의사 가셰의 초상’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 등 수십 점의 걸작들을 그리며 마지막 창작혼을 불살랐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미술관의 쉬라 휘그텐 관장은 ‘의사 가셰의 초상’을 ‘초상화 속에서 불멸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했다.
모델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자화상을 반복해 그려야만 했던 고흐가 필생의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도 ‘그림을 통한 영원한 삶’이었다. 물결치는 듯한 푸른 색조의 배경, 모자를 쓴 채 턱을 괴고 있는 의사의 얼굴은 화가 자신의 설명처럼 그늘져 보인다. ‘나만의 일, 그것을 위해 내 삶을 위험에 몰아넣었고 그것 때문에 내 이성의 절반은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고 고흐의 마지막 편지는 토로하고 있다. 고흐는 1890년 파리 북동쪽 자동차로 30분쯤 걸 리는 오베르-쉬르-와즈에서 그해 7월27일 사망할 때까지 모두 70일 살았는데, 이 기간에 남긴 작품이 70점이고, 이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작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70일 동안 70점의 명작을 남긴다는 것은 신이 아닌한 불가능한 일이고 보면, 고흐를 후원하면서 그 가까이에 있었던 가셰 박사가 가짜 그림 주모자로 의심을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Tip : 가셰 박사(1828∼1909)는 당시 여러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하면서 세잔느, 고흐, 피사로, 르느와르 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있다.
고흐 그림은 현재 세계에서 거래되는 그림들 중 가장 비싼 값에 팔리고 있는 것으로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가짜임이 판명나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아를르의 여인들', 일본의 한보험회사에 6천만 달러에 팔렸다는 '해바라기' 등이 가짜로 판명됐다. 그리고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진품인 양 버젓이 걸려 있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싯가 8천만 달러 상당) 또한 가짜일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어떤 전문가들은 고흐의 서명이 들어있는 7백 여 점의 현존 작품 중 적어도 1백 점 이상이 가짜일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프랑스 각종 시사주간지, 일간지 등이 앞다투어 가셰 박사에게서 가짜 그림 혐의를 캐고 있는 데는 나름의 과학적 근거가 있다. X-레이 투 시술 각종 감식기법의 발달은 고흐가 물감으로 썼던 다홍색 염료의 제라늄 래커가 변색되는 과정, 그림을 그릴때 붓만 사용했는지 아니면 칼도 사용했는지의 여부, 그리고 고흐가 썼던 화폭 천이 1 ㎠ 당 가로 세로올이 12×18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림을 완성한 후 수평으로 포개서 보관했는지 아니면 캔버스를 세워놓고 보관했는지 등을 낱낱이 밝혀 내고 있고, 이에따라 가짜라고 혐의를 갖는 근거가 마련되고 있는 것.
다니엘 지로디라는 감식 전문가는 "고흐의 진품 그림은 다홍색이 변질됐기 때문에 그가 진정으로 선택하고자 했던 색상은 사실은 가짜 그 림에 남아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창너머 풍경 > 감성 - 통하는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Les Feuilles Mortes - Lisa Ono (0) | 2010.10.20 |
---|---|
여성은 그 자체로 여성이다 - 마이욜의 지중해 (0) | 2010.09.28 |
이 거지같은 말 -서영은 (0) | 2010.08.21 |
아담의 창조 - 미켈란젤로 (0) | 2010.08.20 |
9일간의 여왕 (0) | 2006.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