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장석주 시인
저 남쪽 거문도 핏빛 동백들이 지고,섬진강변 매화꽃이 한창이다. 매화와 산수유꽃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다.
작년에 훌쩍 거처를 남쪽으로 옮긴 후배는 꽃놀이 오라고 성화다. 이러저러한 일에 매인 나는 꿈쩍을 못한다.
꽃비 흩날리는 매화나무 아래서 벗들을 불러 마시는 술이 매화음(梅花飮)이다.
나는 어느 결에 벗들 모아 매화나무 아래에서 덕담을 하며 술잔을 기울일까.
올봄에는 꽃놀이 대신 뜰에 매화나무 몇 그루를 구해 심으리라.어느덧 귀밑머리가 허옇게 세었으니,매화나무가 자라 그 꽃을 아껴 완상(玩賞)할 이는 내가 아니다.
해거름 지고 새아침이 밝아오듯 내가 심은 매화나무는 뒷날에 올 이들의 몫이다.
겨우내 풀이 죽은 듯 움직임이 없던 금광호수의 가창오리들 몸놀림이 부쩍 분주해졌다.
벽오동나무의 잎눈들이 도톰해지고,홍매화 가지마다 달린 꽃눈들은 며칠 뒤면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마둔지 주변에 사는 화가의 집에서 얻은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라고,산 너머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곤줄박이가 앉았다 떠난 감나무 가지가 저 혼자 부르르 떨다가 멈춘다.
이윽고 제 슬픔을 가라앉힌 듯하다.
어디에선가 암컷 나방 한 마리와 짝짓기를 하기 위해 수백 마리의 수컷 나방들이 공중을 날아간다.
내 귀에 어디선가 수만 마리의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봄비는 천지간에 고요한 소음을 채우고 내린다.
누에가 뽕잎을 갉는 소리와 봄비 소리는 닮아 있다.
하나 그 소리는 환청이다.
아직은 뽕잎도 없고 누에도 없는 철이다.
그 환청은 땅속에서 움트려는 씨앗들이 태동하는 소리다.
바람은 미나리 향내를 품은 듯 상큼하고,무릎에 내려앉는 햇볕은 따뜻하다.
나는 마당의 나무의자에 앉아 노모가 찐 고구마를 한 입씩 베어먹으며 책을 읽었다.
반일정좌(半日靜坐) 반일독서(半日讀書)로 하루를 소일하고 나니 어느덧 해질녘이다.
공연히 데운 정종을 한 잔 들이켜고 싶어진다.
불현듯 벗들을 불러 모아 푼돈을 놓고 포커를 하던 밤들이 그립다.
그 도락에 취해 있던 밤들의 웃음소리,유쾌한 농담들.어느덧 그 벗들은 다 흩어지고 몇몇은 벌써 성급하게 이 세상을 떠버렸다.
고금의 지극한 도락에 취한 그 이튿날이 출근하지 않아도 좋은 일요일이라 주말 밤은 느긋하고 풍요로웠다.
봄날 저녁 해지는 걸 바라보면 내 뇌수는 알코올에 적신 듯 몽롱해진다.
나는 길고 느긋하게 다가오는 박모의 순간들을 사랑한다.
미국 해군 관측소가 황혼을 세 단계로 나눈다.
시민박명,항해박명,천문박명이 그것이다.
시민박명은 해가 떨어진 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켜야 할 때 시작된다.
항해박명은 그로부터 30분 뒤에 시작하는데,항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밝은 별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시각이다.
천문박명은 일몰 후 1시간 이상 지난 뒤에야 시작한다.
이때는 희미한 별들까지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다.
갑자기 어둠이 짙어지고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 깔린다.
숲에서는 너구리,올빼미,박쥐,부엉이 같은 야행성 동물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낮에 읽던 책을 다시 손에 든다.
바느질을 할 줄 몰라 단추 하나를 달 때도 늘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빨간 핏방울이 동백 꽃잎처럼 피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를 천천히 읽었으면 좋겠다.
초저녁 잠이 많은 노모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잠꼬대를 한다.
매화 꽃비가 내리고,산비둘기가 구구국 우는 밤에도 봄날은 흘러간다.
봄날의 정취를 느끼는 것,그리고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카잔차키스),그게 행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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