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그림들 중에 유독 애잔한 감수성을 풍기는 테마가 있다. 바로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이 있는 풍경이다. 화가는 먼발치서 다정한 연인, 부부, 또는 동행자들을 관찰한다. 고흐는 자신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반려자를 이미 곁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평생의 반려를 늘 곁에 두고 있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안정감, 홀로 있기보다는 함께 있기에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 같은 것이 고흐의 그림 속에 녹아 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세밀하게 묘사하지 못하고, 다만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화가의 시선은 수줍게 밀려나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산책하는 커플, 그리고 초승달", 1890
고흐는 평생 반려자를 찾았다. 여러 번의 격렬한 짝사랑, 매춘부 시엔과의 동거 등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짝을 찾을 수 없다고 느낀 뒤에도, 고갱이나 베르나르 등 화가들과의 공동생활을 통해 일종의 대안가족을 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모든 필사적인 노력이 무참하게 실패한 뒤, 고흐를 기다리고 있던 가장 절망적인 풍경은 바로 테오의 결혼과 출산이었다. 고흐의 두려움 섞인 예상대로, 테오는 요하나와 결혼하자마자 고흐와 멀어졌다. 테오는 고흐를 향한 가망 없는 투자가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부양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테오의 고흐를 향한 희망과 인내심, 그리고 조건 없는 애정은 이제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고흐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테오는 고흐에게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을 주었지만, 고흐는 테오에게 그 애정에 보답할 길을 찾지 못했다.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고흐의 성격 또한 바꿀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있는 풍경'을 그릴 때마다 고흐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뼈아픈 결핍을 느꼈을 것이다. 너무도 부럽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는 테오에게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자'고 끊임없이 설득했지만, 테오는 자신의 길이 '화가'가 아니라 '화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낭만적인 이상주의자였던 형에 비해 테오는 매우 이성적인 현실주의자였던 셈이다. 테오가 요하나를 향한 오랜 구애 끝에 드디어 결혼하게 되자, 고흐는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마음을 다해 축복해줄 수가 없었다. 형으로서 동생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동생이 가족을 가지게 되면 자신을 후원해주기 어려울 것이라는 공포가 더욱 컸던 것이다.
고흐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생레미의 요양원을 나와 테오 가족과 합치는 것이었다. 테오만 곁에 있어준다면, 고흐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그리웠던 테오와 만나는 순간, 고흐는 테오가 자신을 더 이상 예전처럼 존경과 애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고흐는 발작과 조울 증상으로부터 상당히 호전된 상태였고, 1890년 5월 16일에는 페이롱 박사가 '완쾌'라고 기록하여 퇴원을 허락했을 정도로 많이 건강해진 상태였다. 다음날 아침 빈센트가 탄 기차는 파리 리옹 역에 도착했다. 테오가 기차역에 마중 나왔지만, 둘의 만남은 전과 달리 어색했다. 고갱과의 이별 직후 아를 병원에서 아주 잠시, 스스로 귀를 자른 고흐가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만난 지 무려 2년 만의 해후였다. 2년 동안 테오는 물론 고흐의 가족들 누구도 홀로 병마와 투쟁하고 있는 고흐를 간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와의 감동적인 재회를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했던 고흐에게, 테오의 태도는 너무도 낯설고 서먹했다. 일단 테오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테오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고, 테오의 바싹 마른 얼굴과 창백한 안색에 비해 고흐는 훨씬 건강하고 잘생겨 보여 요하나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요하나는 이후에 그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창백한 환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내가 만난 그 사람은 다부지고 훤칠한, 어깨도 넓은 대장부였다. 건강한 혈색이 감돌았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으며, 아주 단호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테오가 묘사하는 고흐가 '아픈 사람'이었다면 좀 더 객관적인 입장, 처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고흐는 '건강하고 혈색 좋은 남자'였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연인들" 부분, 1888
고흐는 그제야 처음으로 테오와 요하나의 아기를 볼 수 있었다. 테오의 집 식탁 근처에는 누에넨에서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 걸려 있었다. 거실에는 크로 평야의 풍경화들과 저 눈부신 '별이 빛나는 밤에'가 걸려 있었다. 침실에는 고흐가 그린 과수원 풍경이 테오와 요하나 부부의 침대 머리맡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태어난 지 겨우 석 달 반이 된 테오의 아들, 또 다른 빈센트가 누워 있는 요람 위에도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요하나는 나중에 고흐가 조카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을 회상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흐는 감격에 차서 아기를 바라보았고, 그 귀여운 아기의 미소는 평생 혼자 살아왔던 고흐를 더욱 외롭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행복한 가족의 풍경 어디에도 고흐의 자리는 없어 보였던 것이다.
감격스러우면서도 어색한 형제간의 조우가 끝난 뒤, 빈센트는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바쁘게 갤러리들을 돌아다녔다. 이번에는 파리에서 뭔가를 이루어보리라 단단히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일본 판화 전시회, 봄철 살롱전이 열리고 있는 샹드마르의 그랜드홀에도 가보았다. 오랫동안 갤러리나 박물관에 방문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화가의 그림들은 더욱 간절한 동경심을 자극했다. 특히 퓌비 드 샤반의 '예술과 자연 사이'라는 거대한 풍경화에 감동을 받았다. 고흐는 퓌비 드 샤반의 그림이 주는 감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샤반의 벽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온 마음을 다해 자비롭게, 내가 믿고 소망했던 바로 그 부활의 장면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동도 잠시, 고흐는 파리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출처-[ⓒ 매일경제 & 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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