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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서재] 신경숙의 서재는 둥지이다.

다연바람숲 2017. 2. 25. 17:35

 

 


 

신경숙  ㅣ  소설가
데뷔  1985년 문예중앙 소설 <겨울우화>
수상  2006년 14회 오영수 문학상 등
작품  <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슬픔>, <외딴 방> 등
 
 

책과 나의 이야기

 

책들을 위한 집

 

소설가 신경숙의 서재 이미지 1

 

20대부터 자연스럽게 제 방은 나를 위한 방이라기보다 책을 위한 방이었습니다. 서재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거기서 책과 함께 자고 먹고 놀고 다했죠. 그래서 어떤 공간을 보면 먼저 책을 둘 장소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이 집을 처음 만났을 때 내부는 텅 빈 채 골조만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천정이 높다는 이유로 덜컥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천장이 높으면 책을 많이 넣을 수 있겠다 싶어서였지요. 제가 외부에 작업실을 두고 작품을 쓰는 체질도 아니고 우리 식구는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기에 집안에 서재가 두 개는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냥 집 자체를 서재화, 작업실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놓고 외출해도 걱정이 없을 정도에요. 책 말고는 가져갈 게 없으니까요(웃음). 하지만 이러한 서재를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것들을 많이 포기했고 그것이 나중에 저를 많이 불편하게 하더군요. 책꽂이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 2층 화장실을 포기하는 등 오로지 책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생활적인 면에서는 많이 불편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책들을 보며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구나'. '너무나 많은 것을 내가 누리고 있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빈 책꽂이가 많아서 앞으로도 상당기간 마음 놓고 책을 꽂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기쁩니다.

 
다 읽고 나니 봄이 왔고

 

소설가 신경숙의 서재 이미지 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읽었던 삼성출판사의 한국문학 전집 60권은 저의 자양분이었어요. 낮에도 창에다 검은 도화지를 붙여 방을 어둡게 하고 불을 켜고 읽었죠. 겨울에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봄이 왔고 뭔가 다른 힘이 생긴 듯이 든든해졌죠.

문학을 하다 보니 여전히 문학신간 위주의 독서가 주가 되긴 하지만 작품을 쓰다 보면 필요에 의해 하게 되는 독서도 상당수 있어요. 이를테면 낚시꾼을 묘사하기 위해서 낚시입문 서적을, 토끼를 등장시키기 위해 토끼 기르는 법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합니다.
30대 지나면서는 저절로 심리학, 정신분석 ,역사, 철학, 미술 ,신화 쪽으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도스토옙스키는 다 읽기가 벅차서 악령 빼고는 나중에 나이 들면 읽어야지 하고 미뤄놓기도 하고 이방인 같은 작품은 매년 한 번씩 다시 읽어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전기나 자서전 ,평전을 읽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스콧니어링 자서전이나 로렌 아이슬리 자서전 ,로맹 가리 전기를 보면서 저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영역이 얼마나 광활한지를 실감하죠.
그때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싹트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은 곧 한 명의 사람

 

서재는 제 보금자리이자 둥지여서 따로 분리가 안 되요. 그냥 함께 사는 것이지요. 책도 그래요. 한 권의 책은 곧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한 사람과 깊이 소통하는 일과 같습니다. 모르고 있던 해박한 지식이나 세상의 수많은 낯선 이야기들을 알 수 있으니 사실 나로서는 득만 보는 소통이 되겠네요. 그들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지에 대한 교감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에게 책은 곧 사람이고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미셸 투르니에처럼

 

소설가 신경숙의 서재 이미지 3

 

햇볕이 잘 드는 한낮에 블라인드를 다 올려놓고 책장을 올려다 보며 서재 바닥에 누워볼 때가 있어요. 바닥이 타일이라 차가워요. 그래도 마치 마당에 누워 있는 것처럼 아늑하답니다. 제겐 조카들이 많은데 그들이 몰려와서 서재에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며 뒹굴기도 하고 책을 읽는 것을 볼 때면 기분이 참 좋아요. 그래서 프랑스의 미셸 투르니에처럼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서재를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오래된 수도원을 구해서 집으로 여기고 사는데 항상 문을 열어두어 온 동네 아이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논다고 해요. 투르니에가 없을 때도 말이죠.
나중에는 소중한 책을 낸 저자들도 초대해서 낭독회를 가져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동의도 구해야 하는 일이니 정말 먼 훗날쯤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작품

 

소설가 신경숙의 서재 이미지 4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 마을이라 읽을거리가 풍성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책을 본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소리 내어 다 읽었던 것 같아요. 간판이며 과수원의 배나 포도를 싼 신문지까지도요. 저는 형제가 여럿인데 오빠가 책 읽기를 좋아해서 그가 빌려오는 책들을 제가 먼저 읽기 시작 했고 그것이 독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는 난독이어서 뭘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에 읽었던 무수하고 잡다한 책들이 모두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었어요. 난쟁이 일가족의 삶을 통해 참다운 문학작품의 품격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소외된 사람들이 그의 문학 안에서는 오히려 중심이었고 이 작품은 저에게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필사를 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간결한 문체인데도 울림이 크고 견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작품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제 문장들이 그런 아름다움을 유지하길 하는 바람입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이야기

 

작년에 그림과 눈물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라는 첫 문장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어요. 또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소재와 제임스 엘킨스의 독특한 이력에도 매력을 느꼈고요. 이 책은 설문을 토대로 쓰여진 글이라서 읽고 있는 이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는 예술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걸 쑥스러워하죠. 감동이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감동의 눈물조차도 타인의 시선을 느껴야 하는 데서 오는 억압도 한 몫 한다고 봐요. 이 책을 읽으면 그런 무의식적인 억압이 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마크 로스코의 텍사스 예배당에 걸린 그림 앞에서 울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나도 당장 그 그림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저 검고 어두운 색깔 때문에 울었다는 사람들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와요. 눈물은 슬플 때만 흘리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이 정화되고 치유될 때도 눈물을 흘리죠. 결국 이 책은 부제처럼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읽다 보면 내 안에 흐르다가 멈춰버린 감동의 눈물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울어 본지가 굉장히 오래되셨다거나 내 마음이 메말랐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 특별히 권해 드리고 싶네요.

 
새해에도 좋은 책을 가까이 두고

 

소설가 신경숙의 서재 이미지 5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모두 따뜻하고 꿈이 많은, 좋은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들 일 것 같아요. 그래서 저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책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새해잖아요. 책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조금 더 많아지고 우리의 만남도 더 깊어지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저자이기도 하고 독자이기도 해요. 그러니 우리는 늘 그렇게 함께 있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시절이지만 새해에도 좋은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 발짝 나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