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너머 풍경/순수 - 비우는말

정조(貞操)라는 것 / 나혜석

다연바람숲 2006. 4. 12. 13:48

 

                                                                                        나혜석 <자화상>

 

 

죽은 애인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간 사람.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를 한 사람.

불륜 뒤 '이혼고백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한 사람.

정조 유린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사람.

21세기 첨단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앞서 가 버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그의 생애에서는 불꽃 내음이 난다.

 

 

 

정조(貞操)라는 것                           

                                  - 나혜석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취미는 일종의 신비성이니 악을 선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추(醜)를 소(笑)로 化할수도 있어 비록 외형의 어느 구속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만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나니 거기에는 아무 고통이 없고 신산(辛酸)이 없이 오직 희열과 만족만이 있을 것이니, 즉 객관이 아니요, 주관이요, 무의식적이 아니요 의식적이어서 마음에 예술적 정취를 깨닫고 행동이 예술화 해지는 것이다.

서양서는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여자 교육에 성교육이 성행하였고, 파리의 풍기가 그렇게 문란하더라도 그것이 악하게 추하게 보인다는 것보다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이미 그들의 머리에는 성적 관계를 의식하였고, 동시에 취미로 알고 행동이 예술화 한 까닭이다.

다만 정조는 그 인격을 통일하고 생활을 통일하는 데 필요하니 비록 한 개인의 마음은 자유스럽게 정조를 취미화 할 수 있으나 우리는 불행히 나 외에 타인이 있고, 생존을 유지해 가는 생활이 있다. 그리하여 사회의 자극이 심하면 심하여 질수록 개인의 긴장미가 필요하니, 즉 마음을 집중할 것이다. 마음을 집중하는 자는 그 인격을 통일하고 그 생활을 통일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由來 정조 관념을 여자에게 한하여 요구하여 왔으나 남자도 일반일 것 같다.

왕왕 우리는 이 정조를 고수하기 위하여 나오는 웃음을 참고 끊는 피를 누르고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 이 어이한 모순이냐. 그러므로 우리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니 좀더 정조가 극도로 문란해가지고 다시 정조를 고수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저 파리와 같이 정조가 문란한 곳에도 정조를 고수하는 남자 여자가 있나니 그들은 이것 저것 다 맛보고 난 다음에 다시 뒷걸음질치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 저것 다 맛보아가지고 고수해지는 것이 위험성이 없고 순서가 아닌가 한다

흐르는 물결을 한편으로 흐르게 하면 기어이 타방면으로 흐트러지고 만다. 젊고 격열한 흐름도 그 가는 길에서 틀려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이니 자연을 누구의 힘으로 막으랴.


- 193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