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꾸밈 - 소품

해주 백자 이야기

다연바람숲 2016. 3. 18. 18:12

 

 

 

미술시장에서 흔히 해주 도자기로 불려온 '해주가마 백자'는 조선시대 말에서 구한말에 이르는 시기에 해주지방 일대의 민간 가마에서 제작된 백자를 가리킨다.

이 무렵은 조선 왕조의 공식 자기제작소였던 분원이 해체된 시기로 분원 자기를 모방한 도자기들이 지방 여러 곳에서 다수 제작되던 때이다.

이전까지 해주 백자는 사실상 미술시장에서 B급 유물의 취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관요가 아니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시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백자를 다시 살펴보면 거기에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속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한국인들의 문화적 DNA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다양한 기형(器形)과 다채로운 문양 그리고 활달한 표현들은 구한말을 전후한 시간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라는 지리적 제약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솔직하고 소탈하면서 활달한 조형 의식이 내재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해주가마 백자의 세계에는 실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담겨있다.

 

흰 백자의 표면을 마치 캔버스처럼 사용해 활달하고 막힘이 없는 회화의 세계를 연출해 보여주는 점이다. 이는 관요 자기의 틀에 박힌 장식 문양과는 전혀 다른 독자의 세계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한국미술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인 자연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셋째는 지방 가마에서 제작된 자기답게 중앙의 유행을 이어받은 지방적인 변형이 솔직, 담백하게 나타나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키가 큰 항아리에 그려진 광한루 그림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였던 광한루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주의 사기장인은 풍문으로만 들었던 광한루의 명성을 되새기면서 그 이름자를 光寒樓로 적고 있다. (원래의 광한루는 廣寒樓이다)

넷째는 고급에 속하는 분원의 청화백자가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그 아류로서 재생산되는 모습을 해주가마 백자 중의 대부분이 청화백자라는 점이 말해주고 있다.

다섯째 지방의 민요답게 엄격한 제약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듯 표현돼있는 문양에서 정교한 문양의 반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즉 자주 등장하는 모란문, 국화문, 초화문을 보아도 때와 장소 그리고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린 듯이 제각기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