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래 모르는 곳으로 / 김선재
얼마나 더 멀어져야 전생(全生)이 물빛인 것을 알게 될까
물빛이 범람하는 계절에는 신발을 벗어야지
수심이 깊어지는 새벽에는 뒤꿈치를 들고
열린 창문 밑을 지날 때는 숨을 참으며
사는 게 빛나던 시간이 있었다
사는 게 빚이던 시간도 있었다
생각해본다
태양이 들판에 베푼 빛을
빛이 그림자에게 진 빚을
부끄러움이 손바닥에 전해야 할 인사를
숲은 새들의 울음으로 날아갈 듯 부푸는데
너는 왜 울지 않는 거니
농담이 농담처럼 농담을 던질 때
지킬 것이 없는 진심은
진심을 다해 진심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심장은 아무것도 예언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의 심장은 다만, 어제를 향해 울 뿐이다
그래서 마음에 찍어둔 점 하나 온통 먹빛으로 풀어질 때
생각하지 않는다
대기권 바깥을 돌다, 사라진 어제의 위성을
잡담처럼 무수한 전날의 소문을
예보처럼 모호한 내일의 일기를
늙어가는 숲의 안부를
날아가는 새는 울지 않아요
나는 다시 신발을 벗어요
뒤꿈치를 들어요
내 긴 잠 속을 지날 때는 가능하면 숨을 찾으며 빚을 피해
빛으로부터 멀리
아무도 몰래 모르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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